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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잊을만하면 연애




전 애인이란 잊을만 하면 연락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잊으려고 할때 쯤 Q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지만 작년 말의 나는, 나와 장거리 연애는 힘들겠다는 Q에게, 펜팔을 하자고 했었다. 녹이 슨 오렌지 색 몰스킨에 내 생각들을 담아 미국으로 보낸지 약 3개월 후인 지난 2월에 곧 보내겠다고 문자가 왔었다.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답장했다.

연락이 올 때가 되지 않았나 했다. 어쩐지 근 며칠간 Q가 내 살에 닿았던 느낌이 더욱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니.

찾는 사람이 크게 없는 나의 인스타 DM 수신함에 알림이 떴다. 보나마나 내 친구중 누군가 나를 스토리에서 언급했거나, 범람하는 밈중 공개적으로 웃을 수 없는 것을 골라 보낸 거겠지 싶어 확인했는데, Q였다. 총 네개의 메세지가 왔다. 

번역일 때문에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서 일하다가 머리나 식힐까 블로그질 하는데 전 애인한테 온 메세지도 번역해야하나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왕 글을 쓸거 제대로 쓰고 머릿속 번역기 풀 가동한 김에 해보자. (그리고 영어를 원문 그대로 올리면 구글에 검색 잡혀서 창피한 상황이 발생할까봐 못하는 것도 있다)

1. 있잖아, 나 공책 보내는데 응원이 필요한 것 같아
2. 6주에 한번씩 글을 쓰면서, 매번 그래, 바로 이번주에는 보내겠어! 라고만 하고 안보내고 있어.
3. 근데 너도 날 좀 독촉해봐. 나 혼자서는 소포 부치는걸 못하잖아.
4.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될거 같은데.

(생각보다 직역을 하면 Q가 완전히 개새끼 쓰레기로 보여서 의역을 해줬는데, 생각해보니 직역하는 편이 내게 진실을 직시하게 할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1. 반갑다.
2. 그런데 왜 네가 못보내는걸 내가 독촉해줘야하고 내가 네 마음을 불편하게 해야하지. 좀 기분나빠.
3. 특히 기분이 나쁜 이유는,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메세지를 받자마자 생각한 선택지들은:
가. 화를낸다 (아니, 지금까지 안보내놓고 왜 나한테 독촉해 달라고 하는건지 모르겠어.) >> 굳이 화를 낼 일도 아니고, 굳이 나쁘게 말할 필요 없음.
나. 슬퍼한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 별로 안기다린데다가, 이미 끝난 사람이 쓴 공책 기다리느니 할일 없는애 같아 보임.
다. 잘해준다 (괜찮아~ 천천히 보내~) >> 이렇게 하면 절대 안보낼거 같음
라. 잘해준다2 (음, 알겠으니 보내주겠니 플리즈?) >> 이렇게 하면 절대 안보낼거 같음2

4. 지금 "베쯔니" 만큼 내 마음을 잘 표현하는 말이 없다. 솔직히 뭘 썼는지 궁금하기도하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Q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방법을 따로 구상해서 Q가 월요일날 당장 공책을 보내게끔 Q의 심리를 조종할 노력을 기울이고 싶은지? 베쯔니.
5. 그렇게 생각하니 영화나 소설속의 악당들은 정말 부지런한 사람들 인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생각이 필요한 일이다.
6. 그래도 Q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걸.
7. 어떻게 해줘야할까.

글을 쓰면 역시 사고능력이 업되나보다. 방금 생각해낸 나의 대답:

나는 이 공책이 너에게 어떤 의미에서도 스트레스를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아. 너가 진심으로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거였으면 좋겠어. 
나도 마냥 기다리고 있기는 싫어서 기대같은건 하지 않고 있었는데. 오히려 네가 이 공책을 못보내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스트레스 받아하는거 같으니까 음...이번 달 내로 공책 받기를 기대할게. 

이렇게 보내야겠다. 은근 마음에 든다. 총총


덧글

  • 2018/08/04 18:3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8/05 19:3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8/08/05 00:5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8/05 19:3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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