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불안감 해소를 위한 정리. 연애





Q랑 어제 저녁을 (멕시칸과 마가리타를...!) 먹었고, Q의 집에가서 그의 룸메이트들에게 인사를 했으며, 그의 집에서 자고 가라기에 잤고, 내 속옷은 역시 섹시하다고 칭찬해 줬으며, 아침에 나를 집에 차로 데려다 주는 김에 같이 아침을 (커피와 도넛을...!) 먹었다.

이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면서 Q가 나를 좋아하는게 맞을까, 하고 물었더니 특히 한 친구에게 과장해서 욕을 한사발로 먹었다. 답답하게 왜 그러냐고. 마치 날씬한 애가 "나 너무 뚱뚱해" 하는것과 같다고. 입장바꿔서 자기가 위의 얘기를 하고 남자애가 날 안좋아하는게 아닌가 징징댔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약간 납득되게 Q가 날 좋아하는게 맞는것 같은데.

마음이 복잡해서 정리하기 위해 쓰는 글. 누구의 잘못을 떠나 그냥 지금 드는 잡다한 생각들:

1. Q는 곧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 여행을 많이 다니기로 했다. 그렇기에 8월에 그를 볼 수 있는건 어쩌면 잘해야 하루밖에 더 남지 않았다. 

이게 마음에 걸린다는 점에 대해서는 약간 반성해야 하는데, 이제껏 사귀어 왔던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유로 나와 시간을 보내지 못할때 보고싶고 아쉬운 마음이 뒤틀리고 전이해서 그 상대에 대해 투정을 부리고, 짜증을 내고, 화를 냈었던 것 같다. 전남친들과 계속 다퉜던 이유 1위가 이것. 항상 싸우고 난 후에 내가 사과하면서 "그냥 보고싶고 아쉬운 마음에 그랬어" 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걸 고치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던 것 같다. (빈도는 줄었지만 그래도 가끔 그랬다.)

오히려 Q와 사귀기 전에 (내가 뭐라 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기 전에) 이런 일이 생겨서 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상대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 나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게 아님을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환기해야한다. 내 자신도 내 시간을 즐겁게 알차게 보내고, 상대의 시간과 인생 계획을 존중해야지. 알게 된 지 두달 밖에 되지 않은 사람을 위해 내가 평소 하고 싶던 것을 안하는 사람도 돌아보면 매력없지 않나. 반대로 나도 자꾸 내 할일을 잘 하고 바쁘게 살아야 매력있을 것임을 명심해야겠다. 

2. 아직 직장이 없으므로 내가 이 나라에 머물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건 그만 징징대고 이력서 돌리면 된다. 행동하는 포도젤리가 되자. 내일부터 확실히 이력서 돌리기. Q도 이것을 아는 상황에서 Q에게 많은 감정적 투자를 바라는 것도 어려울 것임은 명심하자. 나 또한 이 부분때문에 Q에게 푹 빠져버리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또 나에게 빠지길 바라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접어 두고 취직에 성공하면 Q와의 (그리고 이 나라에서 또 다른 사람들과의) 기회가 덤으로 따라올 것임을 명심하자. 

3. Q는 정말 사람이 친절하다. 나에게 베푸는 칭찬과 친절이 그냥 매너이고 그의 심성인지, 내가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친절해도 안좋아하는 사람한테 잘해주고 만날까. 친절하게 거절하겠지. 이것도 과대망상이고 확대 해석이다. 있는 그대로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대로 받아들이고 친절과 칭찬을 고맙게 받아들이자. 깊이 생각하지 말자. 칭찬과 친절을 베풀었는데 상대가 다른 의도가 있어서, 혹은 할일 없어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칭찬하고있다고 비꼬아 보는것 만큼 멍청하고 상대에 대한 무례도 없을 것이다. 

4. Q랑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 

하지만 나의 금사빠적인 성향을 이번 기회에 좀 개선해보자. 만나자마자 사귀고 싶고, 결혼하고 싶고, 이런 생각 하는것 자체가 이젠 웃기기도 하다. 솔직히 아직 진지하게 만나볼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게 당연하다. 연락은 계속 하지만 2달에 걸쳐 고작 다섯번 만났다. 나도, Q도 이제 20대 초반도 아니고, 굳이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인생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나랑 정말 잘 맞고 좋은 사람이고, 어쩌면 결혼 상대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관계를 굳힐 필요가 없다. 오히려 내가 이제껏 이 블로그에 써 왔듯이, 이 알쏭달쏭하고 설레고 초조한 상태야 말로 로맨스이고, 이를 마음껏 즐겨보도록 해야겠다.  

5. Q의 장점과 단점

장점은:
(1) 잘생겼다. 물론 내 눈에.
(2) 착하다. 순둥하고 원만하다.
(3) 창의적이다. 음악에 소질이 있고, 여러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갖고있다.
(4) 쾌활하고 사교적이다. 굉장히 외향적이라 나랑은 반대이지만 그게 사실 나같은 내향적인 사람들에게는 득이 될 수도 있음을 느꼈다.
(5) 유머감각이 나랑 맞는다.
(6) 음식 좋아하고 요리 좋아하고 먹는거 안가린다.
(7) 긍정적이고 너그럽고 여유있다. (화 잘 안내는 스타일)
(8) 스타일이 내 취향. 수염도 있고 타투도 있고, 내 눈에 "멋"이 있다.
(9) 자기 관리를 잘하지만 그렇다고 칼같지도 않다 (운동, 명상, 취미생활등)
(10) 몸과 정신이 건강하다.

단점은:
(1) 교양관련 지식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클래식이라던가 그림, 고전 문학, 철학 이런 것들. 나도 뭐 최고 수준은 당연히 아니고, 이게 엄청 중요한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대화를 할때 이걸 아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Q와 대화를 할때는 기본 전제를 약간 조정해야한다.모르는걸 알거라고, 혹은 아는걸 모를 거라고 전제하는게 양쪽 다 내가 오만하게 보일 수 있어서 좀 불편하다? 싶을때가 있다)
(2)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다 (그런데 본래적 범죄 (malum in se)은 아니고 금지적 범죄 (malum prohibitum)였기 때문에, 그리고 전과 기록은 판사의 재량으로 남지 않았고, 그 후 인생을 착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괜찮다고 판단했다.)

6. 이렇게 글을 쓰는게 불만을 가장한 자랑이 아니라는 점.

아니, 뭐, 어떻게 보면 자랑 맞다. 이렇게 괜찮은 남자랑 기회가 생겼다는데에 감사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괜찮은 남자랑 만나게 됐는데도 불안한 내 마음이, 그리고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내 경험들이 사실 밉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준 적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보내는 이런 신호들의 진심이나 기의에 대해 잘 모르겠다. 그래서 왜 이렇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내 시간을 주지 않았는지 내 자신이 약간은 원망스럽다. 앞으로는 Q만큼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만나는게 내 자신에 대한 예의이고 사랑임을 느끼고 있다.

예전 글에서도 한 말이지만, 바르트가 말하길 불안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것으로, 사실 불안해 하는 사람에게 해야하는 말은: 네가 불안해 하는 일은 이미 일어났어, 라는것. 내가 불안해 하는 것은 Q에게 거절 당하는 것. Q는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날 거절했던 것은 전남친들과  B, H. 그 거절들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내가 한 거절은 잊고 내가 당한 거절만 기억하고, Q를 내가 거절하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번 거절해볼까. 그럼 달라질까. (그런데 Q에게 거짓말처럼 방금 아침에 도넛 고맙다고 문자가 왔고 나는 신나서 또 엄청 구구절절하게 칼답장했지)

당황스럽고, 두렵고, 설레고, 떨리고, 무섭고, 좋고, 들뜨고, 신기하고, 즐겁고, 모든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상반되는 파동이 소거되듯, 분명 수많은 감정들이 드는데도 한편으로는 잔잔하다. 내 몸에서 나는 그의 향기가 편안하다.


덧글

  • 2017/08/15 14:36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8/22 15:1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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