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예감, 이기심, 그리고 성향. 연애



간밤에 꿈을 꿨다. 꿈에서 Q에게서 문자가 와서는 정말 미안한데 오늘 못 볼 것 같다고하며, 다음에 만나자는 말도 없었다. 문자를 받고 직감했다, 아 끝이구나. 아직 여기는 새벽 6시 반정도. 예지몽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원래 내가 촉이나 감은 좀 좋은 편이다.

근래 들어 Q가 좋긴한데 또 뭔가 예전에 B를 원했던 만큼 갈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을 느꼈다. 특히 Q가 나를 열성적으로 쫓아오는게 아니어서 아직 질리지는 않았는데, 한편으로는 Q가 뭔가를 앞으로 몰고가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아 좀 시큰둥하다. 매일, 혹은 하루걸러 연락이 오는걸 보면 마음이 없는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나를 아주 마아아아악 좋아하는 것도 아닌것 같고. Q입장에서는 그래, 내가 좀 바쁘고 연애에 딱히 크게 관심은 없지만 너랑 있으면 재밌고 너는 핫하니까 네가 날 좋아한다면 그걸로 자신감도 생기고 기분 좋으니까 널 만나는거에 딱히 이견이 없어, 이런 느낌이 온다.

라고 쓰긴 썼는데, 결국 내 감정의 투영이 아닌가 싶다. 

저번에 B랑 마지막 만남을 갖기 직전에 들었던 생각이 다시 든다. 나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정말 상대를 마음속 깊이 위하고, 배려하고, 이 사람을 위해 헌신한다기 보다는, 그냥 이기적으로 심심할땐 이사람이 나랑 놀아줘야 하고, 내게 관심을 보여줘야하고, 나를 이해해줘야 하는 그런 갈망을 타인에게 느끼는 것이다. 즉, 내게 연애감정이란 결여의 자각이고, 그것을 상대에게 채워주길 요구하는 "못된" 감정이다. 반대로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이 뭘까, 저 사람이 내게 필요로 하는 것이 뭘까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신 굉장히 얄팍하게 내 외모나 치장, 말투, 행동 부분에서 상대의 취향에 맞춰 내 본모습과는 약간 다른 필터를 씌운다고 하나. 그런 고민과 그런 노력 정도. 하지만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은 잘 든 적이 없는 것 같다. 나! 나! 나! (Me me me!) 하는 나.

그렇다고 해서 그 결여를 내가 채워줄게!! 채워주겠어!!! 라고 하며 달려오는 사람은 그만큼 그 자신의 결여가 크다는 것을 신호하기 때문에 급속히 정이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쿨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안에 실재하는 결여의 차이는 논외로 두고, 적어도 기표만을 놓고 본다면 쿨한 사람은 결여가 적은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결여가 큰 사람으로 보이고, 전자의 경우에는 내가 줄 것보다 받을게 더 많을 것 같은 기대감이 알게모르게 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쿨함"을 원한다는 것은 내가 관계에서 이득을 보겠다는 굉장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마음이다. 그게 잘못됐다는건 아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것은 인류를 지금까지 살아남게 한 어떤 생존본능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기에. 이기적일수록, 계산적일수록 진화론적으로는 우월하겠지. 

Q, 난 네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조금은 더 강하게 나를 원한다면 좋겠어. 경계와 조심은 다 갖다 버리고 약간 나한테 미쳤으면. 네가 너의 결여를 나의 모양으로 빚어놓고 있었으면.

판타지가 있다. 내가 한 사람의 뮤즈가 되는 판타지. 그가 나랑 있으면 영감이 솟아나고, 창작욕구가 넘치며, 내가 뭔가 한 사람의 성공의 요인이 되는 그런 판타지 말이다. 나는 기꺼이 그를위해 자신을 대상화, 사물화하지만 사실 그의 성공이 내 손아귀에 달려서, 내가 등을 돌리면 그가 이뤄온 모든 것들을 다 무너지게 할 수 있는, 그런 권력을 원한다. 

"네가 네 방에 레이저를 설치하는 걸 상상하고 있어."

전혀 그렇지 않은 문맥임에도, 나를 상상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에 굉장히 달아올라버렸다. 

로맨스란 권력의 조율일까, 권력하면 당연히 BDSM으로 이야기가 조금 샐 수 밖에 없다.

내가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임은 틀림이 없지만, 서브미시브한 성향이 아님은 약간 짐작하고 있었다. 대중적인 매체에서는 서브미션과 마조키즘을 한데로 묶는 경향이 있으므로, 나는 내가 고통을 좋아하니 당연히 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E는 나를 굴복시키는 것을 좋아했고, 내가 수치스러워 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으며, 나를 조종하고 싶어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완전한 사육"이 E의 판타지였는데, 뭐, 그의 그런 성향이 침실 뿐만 아니라 실제 관계에도 스며들 때 그게 얼마나 해로웠는지는 오늘은 얘기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고래고래!)당시에는 그 싫은 마음 조차 내가 즐기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싫은건 싫은거지 그걸 굳이 좋아할 필요가 없었다는걸 이제야 깨닫는다. 싫어!!! 싫다고!! 싫었다고!!!!!!!

마치 E가 장동민 스타일의 개그를 좋아할때 나는 사실 전혀 웃기지 않고 불편했는데 그냥 E가 너무 좋아하니까 따라 웃다보니 나중에는 그게 약간 웃기다고 생각했던, 그런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내가 어렸고, 뭘 몰랐고, 내가 좋은게 좋다, 싫은건 싫다, 말 못했고 내 자신조차도 속였던 것이 크다. 묶이는 것 보다는 묶는게 좋고, 맞는것 보다는 때리는게 좋고, 내가 욕하고 내가 휘두르고 싶다고, 이제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요약해서 나는 생각보다 도미넌트한걸로. (그런데 웃기다. 돔은 섭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이타적인 사람이고, 섭이 오히려 이기적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결국 나의 원동력은 이타심일까 이기심일까. 둘의 절대적인 구분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 부터가 틀렸을까.)

다시 쫓고 쫓기는 연애 얘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쫓기는 것 보다 쫓는 것이 더 좋다. 대신 쫓는 것이 재미있을 때는 상대편에서 "나 잡아봐라" 하고 확실한 신호를 주면서, 마지막에 마지못해 잡혀 줘야한다. 가끔 술래잡기를 할 때 나한테 잡히는게 죽어도 싫어서 정말 열과 성의를 다해 도망가려고 놀이터 밖까지 뛰어나가는 애들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나혼자 놀이터에 남겨져 버리면 너무 쓸쓸하기 때문에, 잡히는게 그렇게 싫은 사람은 애초에 술래잡기 따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 그들은 또 그렇게 절대 잡히지 않는 것에서 권력을 느끼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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