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lude: 로맨스가 필요해 연애

출근하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남성 두분이 몸싸움이나서 경찰이 출동하느라 기약없이 기다리게 되어 글이나 쓸까하고 이글루스를 열었다. (근데 이글루스를 폰으로 열자마자 방금 열차가 출발했다ㅋㅋ)

저번 글을 쓰다보니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보게 되어 글로 정리해 보고, 되돌아 보고 싶었다. 꽃다발과 촛불을 곁들인 저녁식사 같은건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가 아니지만 로맨스에 있어서 공식은 없다. 단지 여러 미묘한 기억 (그리고 후관론적으로 미화된 기억)이 있을 뿐이다. 

*아래 기억의 단편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했다기 보단 그때의 감정을 살리는데 충실했다.

1. 중학교 1학년 때 내 짝은 시간이 흘러 다른 반이 되었을때도 가끔 내가 복도나 근처 놀이터를 지나가면 "쟤가 내 마누라야! 마누라 안녕!" 하고 자기 친구들이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인사하곤 했다. 그는 나를 좋아한것도 아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완전한 허구 속에서의 구애가 13/14살의 나에게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게 했다.

2. 고등학교때의 흑역사를 뒤로 하고 대학교 때 어느 여름 친구가 된 J. J는 내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둘을 밀어준다는 핑계로 J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나서 놀게됐다. 게다가 내가 힘들거나 슬프다 하면 무조건 답장은 "나와." 였다. 어느날 택시안에서 "너는 내가 너한테 고백하면 받아줄거야?" 라고 그가 물었고, 나는 "내가 미쳤냐"고 질문아닌 반문했다. "내가 무릎꿇고 고백해도?" "네버." 그는 결국 "너앞에서 무릎꿇고 딸쳐도 안받아줄거야?" (그렇다. 내 인생에는 자기가 하는 말에 터부가 없는 참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 택시 아저씨는 앞자리에서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고 했고 나는 깔깔웃으면서 "진짜 무릎꿇고 딸치면 생각해볼게" 라고 했던거 같다. 그랬더니 그는 어깨동무를 하며 "역시 그래서 나는 너가 좋아"라는 말을 했고, 우리는 주황빛으로 물든 밤의 차도를 무단횡단하다가 어느샌가 손을 잡고 뛰고 있었다. J의 행동들이 나에대한 어떤 연애적인 호감에서 온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나 또한 J와 연애를 하고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굉장히 다른 의미로 나는 J와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했고, 예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J를 오랫동안 특별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3. 내 첫 "남자친구"는 K였는데, 나는 그에게 사실은 어떠한 끌림도 호감도 없었지만, 누군가를 남자친구로 사귄다는 것이 아예 뭔지를 몰랐던 시기에 그게 궁금해서 만났던 것이기 때문에, K에겐 약간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다. K가 내게 보여준 애정표현 중에 그나마 한가지 기억에 남는게 있다면, K는 당시 소규모 지방 방송국에서 게스트 디제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오직 나를 위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한시간 내내 방송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내 이름을 언급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만 밝혔을 뿐.) 텍스트는 수많은 대중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서브텍스트의 유일한 관객은 나였다는 점에서 즐거운 기억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받은 사랑 중에는 가장 이벤트 스러운 애정 표현이었다고 본다. 소위 말하는 "이벤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나조차도, 공개적으로 하는 언표행위의 표면 아래에 있는 둘만의 인사이드 조크/러브레터는 환영인것 같다. (이 글을 쓰다보니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가 뭔지 슬슬 드러나는것 같은 감이 온다.)

4. H와의 첫 만남은 커피숍에서 성사되었었는데, 테이크아웃 할거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제대로된 커피잔에 커피가 나왔다. 문제는 자리가 없었다는것. 결국 H와 나는 커피잔을 그대로 든 채로 밖으로 나가서 주차장 화단 턱에 앉아 우스꽝스럽게도 손에 커피 잔과 접시를 들고 있게 되었다. 게다가 머리위 나무에서는 송충이가 끊임없이 떨어졌는데, 크고 작은 송충이들을 서로의 머리와 몸에서 떼어줘야 했다. H와의 두번 째 만남 때, H가 자신은 폼 롤러 위에 올라가서 눈을 감고 중심을 잡는 연습을 하곤 한다고, 나에게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내 앞에 서서 내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살짝 내 허리를 잡아줬고,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살짝 대고. 폼 롤러위에 서서 H를 향해 앞으로 넘어지지는 않으면서, 뒤로 넘어가지도 않게끔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서있었는데. 그 순간만큼 두근거리고 로맨틱하고 짜릿한 순간이 있을까. (그리고 그 상황의 메타포란!) 

5. "자기/여보" 나 "dear/baby/honey/sweetie" 등의 애칭 사용을 싫어하는 편인데, 애칭이 굉장히 괴에에엥장히 설레고 좋을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말들을 주고 받는 사람과 내가 연인이 아닌 것이 확실할 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애칭을 사용해서는 안될때 애칭을 서로 사용하게 되면 알게모르게 짜릿하다. 밖에서 연인이 아닌 사람과 연인인척 하는것도 비슷한 경우다.

쓰다보니 위에 "공식이 없다"고 썼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말하는 로맨스란, 내심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서로에 대해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는 상호간의 공개적, 표면적인 이해를 전제로, "사랑한다" 라는 둘만의 룰에 따른 허구의 놀이를 말하는 것 같다. 즉, 나에게 "사랑한다"라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척"을 굳건히 약속하는 놀이이다. 그 사랑놀이의 허구성을 인정하되, 그 전제인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가 진실 또는 허구일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이중적이고 불안정한 픽션 말이다. (허구와 허구를 곱하면 진실이 될까?) 

한마디로 말하면 고개를 저으면서 "예스"라고 말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노"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때 느껴지는 몇겹의 감정들, 그는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여러방향으로 교차하는 선들을 줄타기 하고 즐기는게 로맨스가 아닐까. 폼롤러 위에서 눈을 감고, 그의 품에 너무 푹 빠져들지 않게 손으로 살짝 그의 어깨를 밀어 내면서도, 뒤로 자빠져서 머리통을 깨지 않도록 그에게 기대며, 그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상상하며 아찔해 하는것. 

하지만 한편으로 꼭 전제가 되어야 하는게 "함께 있는 동안 만큼은 이 놀이를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룰의 변형 없이 계속 같이 해 줄거다" 라는 (놀이터 친구에 대한 것과 비슷한) 믿음 또한 중요하다. 즉 그렇게 중간에 서있다가 내가 뒤로 넘어가면 나를 끌어당겨 줄 그의 손과, 내가 앞으로 넘어지면 나를 꼭 안아줄 품을 기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중심을 놓치게 되면 내가 그 룰을 일방적으로 변형해서 그의 게임이 무산되게 되므로, 중심을 잃지 않을 나의 책임도 있다고 본다.

E와는 적어도 처음엔 정말 좋아서 만났기에 로맨스가 많았을거라 생각하는데도... 되짚어 보니 정이 떨어져서 그런가 그것들을 기억하는게 좋은느낌은 아니다. 아니면. 어쩌면. E와는 로맨스가 없었다. 그래서 아마 우린 헤어지게 된게 아닐까. 

나는 나쁜 남자가 좋아서 나쁜 남자들과 얽히는게 아니라, 나쁜 남자와의 연애는 내가 이해하는 대로의 "로맨스"의 전제조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이기 때문에 일단은 그쪽에서 기웃거리는 경향이 있다. E는 전제 조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만족했지만, 나와 사랑놀이를 하기를 꺼려했고, 그런 의미에서 그와는 로맨스가 없었다, 고 하기보단 불가능했다. 나 또한 E에 대해서는 전제 조건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B와는 서로 전제조건은 만족했지만, 사랑하는 척을 하자, 는 내 제안은 B가 완강히 거절했기 때문에 로맨스가 불가능해졌다.

D, G와 I는 나를 사랑하기를 거부할 생각 조차 않기 때문에 전제조건 자체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약속하고 난 후에 과연 어떤 로맨스가 가능할지가 궁금하다.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으로 부터, "서로 사랑하는 척"은 불가능해진다. 과연 그 상황에선 어떤 놀이가 가능할까. 그 놀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 아마 평생 로맨스와 그 설렘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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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7/04/21 07:41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4/21 08:1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4/21 10:1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7/04/25 16:3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7/04/21 22:52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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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5 16:42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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