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참을 수 없는 타인의 시선에 관하여 연애

1.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엄마라는 존재로부터 나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아직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기 위하여 걸음마를 뗀지가 5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부터 나는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왔다. 엄마가 원하는 성적, 엄마가 원하는 학교, 엄마가 원하는 직업. 그나마 나만의 사적인 영역으로 엄마가 구석까지 들여다 보고 조종하려 하지는 않았던 부분이 연애였던 것 같다. 그래서 연애에서만큼은 남들이 당연히 여기는 기준에서 일부러라도 엇나가려고 했었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러나 곧 나만의 기준과 경험으로 형성되어온 연애의 영역과 엄마의 간섭이 작용하는 영역이 크게 충돌하게 될 것 같다. 아니, 이미 충돌하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 사운즈 한남 맞은편 골목에서, 약 3년전에 그랬던 것 처럼 나에게 결혼을 하자고 Y가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했다. 지금까지 자기를 지원해주고 믿어줘서 고맙고,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지난 3년동안 그랬던 것 처럼 앞으로 같이 인생을 지어 나가고 싶다고. 당연히 예스, 했다. 어제 정오에 내가 예약하고 결제한 프로포즈링을 손에 끼면서 말이다.

그래도 엄마한테는 빨리 말씀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인 것 같아, 전화를 드렸다. 엄마, 나 반지 받았어.

어머 어떻게해... 나는 모르겠어 그냥 너가 알아서 해.

역시 기뻐하지는 않는 눈치다. 엄마, 외국 스타일로 지금 당장 뭔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그냥 반지만 받은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

...응 알았어.

뭔가 떨떠름하게 끝난 대화에 초조하다.

왜 엄마는 100% 나의 결정을 믿고 행복하게 감사하게 생각해 주지 못하는 걸까. 그보다도, 왜 그런 엄마의 시선에 내가 휘둘리는 걸까. 내가 선택한 사람이고 내가 선택한 인생인데, 엄마가 전화기 너머에서 입을 떼기 전에 만들어버린, 약간 늘어진 정적은 이제 걸음마를 뗀 나에게는 조금 무겁다.


2.

비록 엄마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다.

매장에서 어찌저찌 직원이 창고에서 꺼내준 미디움 플랩 백 두 가지. 첫번째는 실버 하드웨어 + 카프스킨 + 쉐브론 조합이었고, 두번째는 골드 하드웨어 + 캐비어 + 퀼트 조합이었다. 두번째가 더 예쁘다는 Y의 말은 무시하고, 첫번째가 나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첫번째를 골랐는데...

문제는 밤에 잠이 안오더라. 두번째가 워낙 클래식한 조합이고, 소재도 더 인기 소재에, 리셀가도 훨씬 높은 것을 보아서는 남들이 더 원하는 스펙인 것 같고. 남들이 다들 원하는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돌아보면 그 이유가 뭔지 알게되고 후회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당장 좋은 것에 눈이 멀어 장기적으로 더 좋은 것을 선택 못한 것이 아닐까. 역시 살 수 있을 때 샀어야 하나.

왠지 이 글을 쓰다 보니 가브리엘 샤넬 여사라면 '남의 시선은 엿이나 먹어라'는 류의 발언을 하셨을 것 같아서 구글검색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Je n'ai rien a faire de ce que vous pensez de moi. Moi je ne pense pas du tout a vous." 당신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나에게는 전혀 쓸모 없다. 나는 당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엄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가브리엘 샤넬의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찾아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가브리엘의 모친은 가브리엘이 12세일 때 사망하였고, 그는 아버지에게 버려져 보육원과 수도원을 전전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엄마에게 정신적으로 묶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감히 짐작하자면 어린나이부터 자아의 홀로서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이미 디자이너가 되었을 때 쯤에는 자신만의 길을 가는데에 지금의 나보다는 능숙했던 것이 아닐까.

엄마가 행복한 것은 나의 행복이기는 하지만. 내 행복이 우선이다. 남의 행복은 둘째. 명심, 또 명심.

추신) 이 글을 쓰면서 위키피디아를 보니 가브리엘 여사가 나치 스파이의 노릇을 했다는데 처음 알게 된 이야기다. 요즘 러시아 하는 짓을 보니 전범에 협력한 샤넬 여사를 추앙하는 것은 뭔가 찝찝한 부분은 있다. 가브리엘 샤넬이라는 개인과 브랜드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굳이 더 샤넬을 갈망하고 싶진 않네.

+3 추가.

방금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Y가 조금 더 번번했으면 좋았을텐데 슬프다고 한다.

무슨말인지 이해는 한다. 동의는 못하지만 이해는 한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슬퍼하니까 조금 섭섭하네. 라고 엄마에게 전했다.

눈물이 차오르는데, 전화기 너머로 엄마도 똑같이 눈물을 가득 담고 있는 것이 탯줄로 이어졌던 두 사람간에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그런 감각으로 뱃속부터 고스란히 느껴졌다. 엄마도 내 심정을 똑같이 느꼈겠지.

내가 행복하면 된건데. 엄마는 번번한 사위도 갖고 싶으신가보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행복이 우선이라서 그러신 걸까. 아니면 엄마도 타인의 시선과 싸우고 있는 걸까.





덧글

  • 2022/03/02 18:4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22/03/03 14:4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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