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28.

27.

B를 어제 우리집으로 초대했다. B는 센스있게 화이트 와인을 가져왔다. 

메뉴는 르 를레 드 랑뜨르꼬뜨 스타일의 머스터드 드레싱 샐러드와 페스토+판체타 소스의 라비올리, 그리고 사프론과 마늘이 들어간 루이유를 바른 바게트를 곁들인 프랑스 남부식 생선수프.

슬픔의 벨라도나를 같이 봤다. 사실은 I와 함께 한번 본 영화지만 처음 보는 척하고 B에게 보자고 했다. 처음엔 어색하다가 나중엔 같이 실컷 웃었고. 

마지막 장면이 한 15분쯤 남은 상황에서 키스를 했고, 아주 길고 긴 전희를 거쳐 언제나처럼 굉장한 시간을 보내고 잠이 들었다.
(자다가 내가 방구낀거 같은 어렴풋한 기억이 난다.....방구소리에 둘다 깨서 어리둥절해 한듯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간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다)

아침에 카페에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한시간 정도 얘기를 했는데, 확실히 B와 나는 매번 만날 때 마다 섹스 전에는 엄청 어색 하다가 후에는 대화가 술술 잘 통한다. 그는 걸어서 나를 데려다주고 진한 포옹을 했다. "너무 오래되기 전에 또 보자. See you before too long"이라는, 달콤씁쓸한 인사를 그가 하고 우리는 각자의 하루를 향해 나아갔다. 


28. 

보자, 에르메스와 L의 이야기. 별거 아니다. 

L은 내가 한참 방황하던 시기에 만났던 사람. 나와 그는 휴학중이었고, 그 공통분모가 있어 금방 친해졌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5년 전이었나, 6년 전이었나.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참이 지나고 굉장히 오랜만에 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굉장히 실망했던 것이 어렴풋하다. 왜냐면 L을 처음 봤을 때, 그의 눈에는 뭔가 반짝반짝하는 것이 있었고, 그를 다시 만났을때는 그의 눈에서 그 빛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당시 E와 썸 아닌 썸을 타고 있었고, L을 만나러 가면서 마사지를 받으러 간다고 E에게 거짓말을 했고 (나중에 안 것이지만 E는 적당히 내가 연락이 없던 시간과 상황을 봐서 대충 눈치를 챘다고 했다.) E와 만나게 된 후로 L에게는 "오빠는 내게 기회를 안줬잖아" 라는 귀엽게 말도 안되는 말로 다시는 연락 하지 말자고 안녕을 고했다. 어느정도 나는 L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걸 E도 느낀게 아닌가 하는게, 그 많은 과거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 중에 E는 L의 이야기를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L에 대한 것 중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 건, 그에게선 정말 좋은 향기가 났다는 것. 무슨 향수냐고 물어보자 맞춰보라고 하길래 뭔가 굉장히 익숙한 노트가 있어서 (오렌지) 잠시 생각하다가 에르메스 아니냐고 물었더니 엄청 놀라면서 어떻게 알았냐고 그랬던게 생각난다. 당연히 그 오렌지 향을 잘 알지. 저번 향수 포스팅에도 썼던 것 같지만 밤늦게 찬바람을 안고 들어오신, 도랑쥬 베르트를 뿌린 아버지의 꺼끌꺼끌한 수염과 뽀뽀의 향기니까. 대신 L의 에르메스는 초록색 오렌지의 향기가 아닌 여행자의 향기였다. 그는 나중엔 떼르로 바꿨다고 했는데, 역시 보야지 만큼 그 때의 그와 (그리고 그 밤 L의 반짝거림과) 어울리진 않았던 것 같다. 몇년 후 한번 내가 쓰기 위해 보야지 한병을 충동 구매했는데, 내 방에 놔두고 간걸 어머니가 발견해서 지금은 아버지가 그걸 쓰시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아닌 아이러니. 그리고 L이후 몇년만에 처음으로 아, 향기가 참 좋다, 하고 내 마음을 흔든 향은 H의 향이였고, 그리고 H의 향기 또한 에르메스표라는것. 

에르메스 브랜드를 떠나서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 또한 오래 전부터 내 최애캐였는데, 나중에 융의 정신분석학에서 헤르메스가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메신저로, 싱크로니시티 (현실과 의식의 우연의 일치)의 기호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고 더 빠져들게 되었다. 헤르메스로 대표되는 융의 싱크로니시티와, 그와 함께 우연하게 반복되는 에르메스 향수들과 내 만남의 여정이 이루는 메타싱크로니시티에 감탄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포스팅을 쓰면서 페북에서 L을 찾아봤다. 금새 찾았다. 그를 잊은 동안 그는 내가 있는 대륙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고,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세지를 한번 보내봤다. 다음주에 L이 사는 도시에 잠깐 들리게 될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난 지금 한번 얼굴 보고 얘기할 수 있으면 좋을것 같기도 하고.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이 글을 본다면 아마 자기 이야기라는걸 단번에 알거다--답장 기다릴게.

+ PS: D가 다음주 화요일 저녁은 어떠냐고 문자를 보냈는데 음... 잘 모르겠다. 좀 생각해 봐야지.


26. 연애

우선.

일단 제가 예전에 비 한국 남성과의 섹스는 한국사람과 달라! 라고 외쳤던 것에 대해 반성합니다. 왜냐면 음 H는ㅋㅋㅋㅋㅋㅋㅋ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K-sex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처음이니까.... 맞춰가는 즐거움이 있음을 기대해 볼까 합니다만, 적잖이 실망스럽기는 했습니다. 어쨌든 이로서 제 가설은 무너졌고, 고소해 하실분들은 실컷 고소해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제와 변명처럼 들리긴 하겠지만 자국남성혐오의 관점에서 그렇게 나눴다기 보다, 실제로 한국에서 남녀에 상관없이 섹스에 대한 담론/교육이 너무 편향되고 부족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글을 썼던 것인데 어떻게 개선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과 정리를 해보고 글을 한번 더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26. 

답답하고 팽팽한 문자 접전 끝에 H는 백기를 들었고, 금요일날 저녁즈음 만나게 되었다. 원래 우리 집에 오겠다고 했는데, 사실은 이사 후 정리가 하나도 안되어있어서 도저히 초대할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집이 마음의 준비가 안됐대"라며 돌려서 거절했다. 그리고 둘이 만나면 주로 하는 활동이 음악감상임을 감안하면, 스피커가 없는 우리집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H는 다음주에 찾아올테니 마음의준비와 스피커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H의 집에가서 와인을 마셨고. 옷을 벗었다. 털이 복실복실한 가슴과 배, 오랜 동안 수영을 해서 그을린 몸과 대비되는 하얀 엉덩이.

너무 급하게 해서 그런지 아래로 공기가 많이 들어갔는데 배에 힘을 주면 또 방구처럼 공기가 나와서 분위기 깰까봐 열심히 참아가면서 했는데 배에서 이상하게 꾸룩꾸룩거리는 소리가 나서 더 신경쓰였다. 그래서 그런지 집중 불가. B와 섹스중 때 밀렸을때만큼 민망했다. 게다가 내가 치질상태가 좀 안좋아서 아마 비주얼적으로 좀 별로였을걸. 으하하하ㅏ

Strike 1. H는 음악에 대해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심지어 음... 전희 중에도 음악이 마음에 안든다고 바꾸러 일어났다.

Strike 2. 콘돔이 있냐고 묻자, 분명히 없는데 찾는 척 하더니ㅋㅋㅋㅋㅋㅋ 없다고 하길래 (그래 그렇지 그럴줄 알았어) 내가 가져왔다고 하자, "너는 콘돔까지 챙겨왔는데 나는 이때까지 계속 지루한 얘기만 너한테 하고있었던거야?"이러면서 큰소리로 웃는다. 지금 돌아보면 콘돔이 없으면 안된다고, 다음주까지 또 기다리게 할걸 그랬다. 그게 여우짓이지.

친구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성급하게 잠자리에 들지 말라고 했다.
엄마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카드를 다 보여주지 말고 최후 한장은 꼭 들고 있으라고 했다.
심리상담선생은 내가 하고 싶은 것과 그런 "룰"사이에서 내가 답답해 하는것 같다고 한다.

Strike 3. H는 끝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아.. 피곤해." (...!) 내 표정을 슬쩍 보더니 "아니 좋은 의미로 피곤해" 라고 하는데,  음. H 너. 매너 꽝이야. 그래서 "그러게. 난 2초 정도 더 필요했어"라고 쏘아줬다. 생각해보니 첫 데이트때도 나에게 피곤하다고 했던 것 같다. 남자들 피곤하다 하는거 진짜 진절머리가 난다. E도 피곤하다 아프다 입에 달고 살았다.

이쯤되면 아웃 해도 할말 없지만, 아직 H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긴 하다. 어쨌든 주섬주섬 다시 옷을 입고, H의 친구의 생일파티에 같이갔다.

아 맞다, 깜빡하고 얘기 안한게 있다. 바로 직전에 저녁을 먹으면서 서로 이번 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하고 있었는데 H가 정말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나 친구랑 잤어."

응...?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된거야?"
"모르겠어. 그냥 어쩌다보니. 난 아무렇지 않은데 걘 되게 속상해 하더라"

..........??????????????????????????.....!!!?!?!??!?!?!?!?!

(한 몇시간 후에 알게 된 것인데 그 친구는, H의 다른 친구와 사귀다 헤어져서 친구와 다른친구 둘 다 힘들어 하고 있는 상태란다. H는 "근데 뭐 어쩌겠어, 나랑 자고 있는데 (she's sleeping with me)". 현재 진행형을 사용한걸 보면 한번만 일어난 일은 아닌것 같기도 하고.)

뭐 아직 H를 많이 좋아하는게 아니기도하고,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어떤 감정이 드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그냥 "아... 뭐 그럴때도 있지뭐" 이러고 넘겼다.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근데 한가지 분명한건, 내가 그를 이해하고있는 것 같다. 아니, 이해라기보단, 설명하자면 좀 이상하긴 한데, H를 보면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이라고 해야하나? 굳이 변명이나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H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흔히 이런 상황에서 "그건 남자가 너를 만만하게 봐서 그런거야"라는 얘길 듣는데, H가 흔한 사람이라면, 아마 그렇겠지.
적어도 나에겐 연애감정이 없다거나 나를 가벼운 관계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일부로 흘린걸수도 있고, 그런 의도 없이도 그냥 같은 이유로 굳이 말을 안할 이유가 없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흘렸을 수도있다. 하지만 내가 H에게 이렇게 시간과 마음을 쏟는건 그가 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고, 만약 흔한 사람이라면, 더이상 시간낭비 할 필요 없겠지.

E가 나에게 바라던것. 세상 모든 남자가 나에게 바라던것. 그걸 해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한가. 모르겠다. 행복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는게 아니라 정말 모르겠다. 아무리 내 자신을 들여다봐도 뭔가 잡히는게 없다. 그래도 한번쯤은 H와 대화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싶은건:

(1) 앞으로도 다른 사람과 계속 잘건지 (콘돔을 안쓰는 H가 다른 사람과 계속 잔다면 이건 알아야한다. 나랑만 잔다면 콘돔을 쓰지 않을 의향이 있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계속 써야하므로) 물어보고

(2) 왜 내게 그 얘기를 꺼낸건지 물어보고

(3) 분명 이런 경우에 화가 나거나, 쇼크를 받거나, H를 나쁜놈이라 불러야 하는게 보편적인 반응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그게 내가 H에게 정말 무관심해서 그런걸수도, 혹 어쩌면 H를 정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어서 그럴수도 있다는 것. 그냥 사람대 사람으로 이거에 대해 대화를 좀 해보고 싶다.

빨리감기해서 H의 친구의 생일파티에는 속상한 그녀가 있었고, 나와 그녀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H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했고, 친구들은 짓궂게 우리 둘의 첫 데이트에 뭐했냐고 물어봤다. H는 "주차장 바닥에서 5시간동안 얘기하고 송충이들이랑 싸웠어" 라고 얘기했다. H는 하모니카를 수준급으로 부는데, H가 친구들과 함께 라이브 연주를 하는동안 나는 잠시 담배를 피우러 다녀왔다. 어디 다녀왔냐길래 "시가렛 브레이크"라 그러니까 이런 분위기에서도 넌 브레이크가 필요하냐면서 웃었다. (내가 사람 많은 곳에 있는걸 별로 안좋아한다는걸 H는 안다.)

내가 돌아왔을 때, H는 나에게 얘기했다. 자신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은데, 내가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나를 만나는게 자신의 지지대 역할을 한다고. 대신 자기는 나에게 충분히 관심을 주고 있지 않냐고. (뭔가 들킨 것 같아서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또 뭐라더라. I don't know, I don't know anymore가 불어로 Je ne sais pas, je ne sais plus 할때보다 별로다 등등 뭐라뭐라 했는데. 아무튼 파티에서 나와서 잠깐 부리토랑 케사디야를 먹고 (먹는 동안 바르트의 연인의 담론에 대해 내가 일장 연설을 했다) H가 나에게 키스를 하고 나는 집에 가는 것으로 일단락 됐다. (그럼 키스는 왜하는건데.)

나는 며칠 후 스피커를 구입했다. 그리고 B에게 우리 집에 놀러와서 저녁 먹으라고 문자를 보냈다.

+ H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가 에르메스였다는걸 화장실을 슬쩍 보고 알게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에르메스하면, L 얘기가 빠질 수 없지.

+ 그리고 왜 나에겐 (1) 베지테리언이나 비건, 유당불내증 등 특이식성이나 (2) 수면장애 (3) 정서장애 (4) 기타 건강문제 가 있는 사람들이 꼬이는가. 그게 딱히 문제인건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거 보다 100프로 뭐든 잘먹고 건강한 사람은 그다지 많이 없나.


Interlude: 로맨스가 필요해 연애

출근하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남성 두분이 몸싸움이나서 경찰이 출동하느라 기약없이 기다리게 되어 글이나 쓸까하고 이글루스를 열었다. (근데 이글루스를 폰으로 열자마자 방금 열차가 출발했다ㅋㅋ)

저번 글을 쓰다보니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보게 되어 글로 정리해 보고, 되돌아 보고 싶었다. 꽃다발과 촛불을 곁들인 저녁식사 같은건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가 아니지만 로맨스에 있어서 공식은 없다. 단지 여러 미묘한 기억 (그리고 후관론적으로 미화된 기억)이 있을 뿐이다. 

*아래 기억의 단편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했다기 보단 그때의 감정을 살리는데 충실했다.

1. 중학교 1학년 때 내 짝은 시간이 흘러 다른 반이 되었을때도 가끔 내가 복도나 근처 놀이터를 지나가면 "쟤가 내 마누라야! 마누라 안녕!" 하고 자기 친구들이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인사하곤 했다. 그는 나를 좋아한것도 아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완전한 허구 속에서의 구애가 13/14살의 나에게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게 했다.

2. 고등학교때의 흑역사를 뒤로 하고 대학교 때 어느 여름 친구가 된 J. J는 내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둘을 밀어준다는 핑계로 J와 나는 거의 매일 만나서 놀게됐다. 게다가 내가 힘들거나 슬프다 하면 무조건 답장은 "나와." 였다. 어느날 택시안에서 "너는 내가 너한테 고백하면 받아줄거야?" 라고 그가 물었고, 나는 "내가 미쳤냐"고 질문아닌 반문했다. "내가 무릎꿇고 고백해도?" "네버." 그는 결국 "너앞에서 무릎꿇고 딸쳐도 안받아줄거야?" (그렇다. 내 인생에는 자기가 하는 말에 터부가 없는 참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 택시 아저씨는 앞자리에서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고 했고 나는 깔깔웃으면서 "진짜 무릎꿇고 딸치면 생각해볼게" 라고 했던거 같다. 그랬더니 그는 어깨동무를 하며 "역시 그래서 나는 너가 좋아"라는 말을 했고, 우리는 주황빛으로 물든 밤의 차도를 무단횡단하다가 어느샌가 손을 잡고 뛰고 있었다. J의 행동들이 나에대한 어떤 연애적인 호감에서 온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나 또한 J와 연애를 하고싶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굉장히 다른 의미로 나는 J와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했고, 예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J를 오랫동안 특별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3. 내 첫 "남자친구"는 K였는데, 나는 그에게 사실은 어떠한 끌림도 호감도 없었지만, 누군가를 남자친구로 사귄다는 것이 아예 뭔지를 몰랐던 시기에 그게 궁금해서 만났던 것이기 때문에, K에겐 약간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다. K가 내게 보여준 애정표현 중에 그나마 한가지 기억에 남는게 있다면, K는 당시 소규모 지방 방송국에서 게스트 디제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오직 나를 위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한시간 내내 방송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내 이름을 언급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만 밝혔을 뿐.) 텍스트는 수많은 대중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서브텍스트의 유일한 관객은 나였다는 점에서 즐거운 기억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받은 사랑 중에는 가장 이벤트 스러운 애정 표현이었다고 본다. 소위 말하는 "이벤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나조차도, 공개적으로 하는 언표행위의 표면 아래에 있는 둘만의 인사이드 조크/러브레터는 환영인것 같다. (이 글을 쓰다보니 내가 생각하는 로맨스가 뭔지 슬슬 드러나는것 같은 감이 온다.)

4. H와의 첫 만남은 커피숍에서 성사되었었는데, 테이크아웃 할거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제대로된 커피잔에 커피가 나왔다. 문제는 자리가 없었다는것. 결국 H와 나는 커피잔을 그대로 든 채로 밖으로 나가서 주차장 화단 턱에 앉아 우스꽝스럽게도 손에 커피 잔과 접시를 들고 있게 되었다. 게다가 머리위 나무에서는 송충이가 끊임없이 떨어졌는데, 크고 작은 송충이들을 서로의 머리와 몸에서 떼어줘야 했다. H와의 두번 째 만남 때, H가 자신은 폼 롤러 위에 올라가서 눈을 감고 중심을 잡는 연습을 하곤 한다고, 나에게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내 앞에 서서 내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살짝 내 허리를 잡아줬고,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살짝 대고. 폼 롤러위에 서서 H를 향해 앞으로 넘어지지는 않으면서, 뒤로 넘어가지도 않게끔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서있었는데. 그 순간만큼 두근거리고 로맨틱하고 짜릿한 순간이 있을까. (그리고 그 상황의 메타포란!) 

5. "자기/여보" 나 "dear/baby/honey/sweetie" 등의 애칭 사용을 싫어하는 편인데, 애칭이 굉장히 괴에에엥장히 설레고 좋을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말들을 주고 받는 사람과 내가 연인이 아닌 것이 확실할 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애칭을 사용해서는 안될때 애칭을 서로 사용하게 되면 알게모르게 짜릿하다. 밖에서 연인이 아닌 사람과 연인인척 하는것도 비슷한 경우다.

쓰다보니 위에 "공식이 없다"고 썼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말하는 로맨스란, 내심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서로에 대해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는 상호간의 공개적, 표면적인 이해를 전제로, "사랑한다" 라는 둘만의 룰에 따른 허구의 놀이를 말하는 것 같다. 즉, 나에게 "사랑한다"라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척"을 굳건히 약속하는 놀이이다. 그 사랑놀이의 허구성을 인정하되, 그 전제인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가 진실 또는 허구일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이중적이고 불안정한 픽션 말이다. (허구와 허구를 곱하면 진실이 될까?) 

한마디로 말하면 고개를 저으면서 "예스"라고 말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노"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때 느껴지는 몇겹의 감정들, 그는 나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여러방향으로 교차하는 선들을 줄타기 하고 즐기는게 로맨스가 아닐까. 폼롤러 위에서 눈을 감고, 그의 품에 너무 푹 빠져들지 않게 손으로 살짝 그의 어깨를 밀어 내면서도, 뒤로 자빠져서 머리통을 깨지 않도록 그에게 기대며, 그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상상하며 아찔해 하는것. 

하지만 한편으로 꼭 전제가 되어야 하는게 "함께 있는 동안 만큼은 이 놀이를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룰의 변형 없이 계속 같이 해 줄거다" 라는 (놀이터 친구에 대한 것과 비슷한) 믿음 또한 중요하다. 즉 그렇게 중간에 서있다가 내가 뒤로 넘어가면 나를 끌어당겨 줄 그의 손과, 내가 앞으로 넘어지면 나를 꼭 안아줄 품을 기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중심을 놓치게 되면 내가 그 룰을 일방적으로 변형해서 그의 게임이 무산되게 되므로, 중심을 잃지 않을 나의 책임도 있다고 본다.

E와는 적어도 처음엔 정말 좋아서 만났기에 로맨스가 많았을거라 생각하는데도... 되짚어 보니 정이 떨어져서 그런가 그것들을 기억하는게 좋은느낌은 아니다. 아니면. 어쩌면. E와는 로맨스가 없었다. 그래서 아마 우린 헤어지게 된게 아닐까. 

나는 나쁜 남자가 좋아서 나쁜 남자들과 얽히는게 아니라, 나쁜 남자와의 연애는 내가 이해하는 대로의 "로맨스"의 전제조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이기 때문에 일단은 그쪽에서 기웃거리는 경향이 있다. E는 전제 조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만족했지만, 나와 사랑놀이를 하기를 꺼려했고, 그런 의미에서 그와는 로맨스가 없었다, 고 하기보단 불가능했다. 나 또한 E에 대해서는 전제 조건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B와는 서로 전제조건은 만족했지만, 사랑하는 척을 하자, 는 내 제안은 B가 완강히 거절했기 때문에 로맨스가 불가능해졌다.

D, G와 I는 나를 사랑하기를 거부할 생각 조차 않기 때문에 전제조건 자체에서 탈락한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약속하고 난 후에 과연 어떤 로맨스가 가능할지가 궁금하다.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으로 부터, "서로 사랑하는 척"은 불가능해진다. 과연 그 상황에선 어떤 놀이가 가능할까. 그 놀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 아마 평생 로맨스와 그 설렘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왜 이런 복잡하고 파국적인 로맨스에서 희열을 느낄까. 내 어떤 경험이나 트라우마의 영향일까? 정신분석 해주실 분 모집합니다.



24 & 25. 끌림이 없음을. 연애

24. 

어제 D와 네번째 데이트를 했다. 확신한건 친구로서는 정말 좋은데 끌림을 느끼지 않았다. 
만약 D가 B나 H처럼 나에게 키스를 했거나 계속 터치를 시도했다면 다르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오늘 섹스를 하기로 한날이었지만 (ㅋㅋㅋ) 너무 피곤하고 바빠서 집에 가야겠다고 미리 차단을 해버렸다.
정말 플라토닉한 감정밖에는 느끼지를 못하겠어서. 
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는길에 아무래도 손을 잡거나 뽀뽀를 하려고 할 것 같아서 계속 (나쁜 의미로) 긴장하게 되고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아니, 심지어 어제 그냥 D가 내 손을 잡았거나 뽀뽀를 했다면 또 다르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앞으로는 부담스러워서 만나지 못할 것 같다. 


25. 

G에게서 계속 만나자고 연락이 오는데
사실 따분한 사람과 또 시간을 보내려니 막막해서 그냥 답장을 안했다. 

+I 도 마찬가지다. 만나면 어느정도는 즐겁긴 한데 아직은 섹스어필을 못느끼고 있다.



뭘까? 
내 몸과 마음이 H를 원하고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확실히 사람 사이엔 끌림이 있고 없고가 있어서 그런걸까.
나는 조금이라도 뭔가 통하는게 있으면 끌림이 강하고 빠르게 생겨왔던 스타일이라 (흔히 말하는 금사빠)
이런 새로운 감정, 특히 훤칠하고 대화도 잘 통하고 착한 친구들에 대한 이런 감정은 당황스럽고 신선하다.
내 생애 첫 프렌드존 (친구 이상으로 안보여, 라고 선을 긋는 것) 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 내용 추가:
방금 D에게서 문자가 와서 어제 차에 단둘이 있었을때 재미있었다면서,
자기는 끌어안고? (cuddle을 어떻게 번역하지) 얘기하는걸 좋아한다면서 나중에 그렇게 하는게 어떠냐는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제발 말로 하지말고 그냥 하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섹스까진 물어보는걸 이해하겠는데 왜 나를 안는거까지 물어봐야돼 ㅋㅋㅋㅋ 그냥 하면안돼?

그리고 난 싫어. 끌어안고 얘기하는거. 섹스 후라면 몰라도.

이 문자가 와서 드디어 깨달았다.
D, G, 그리고 I와의 만남에서 부족한게 뭔지.
난 로맨스가 필요해. (다음 화의 부제가 될 거 같은 예감이...)


21, 22 & 23 연애

21.

H와 금요일 저녁을 함께 보냈다. 

나의 생식기관은 나와 한팀이라는 사실을 잊고있나보다. 팀워크에 초치는 짓 (부정출혈)을...
불이 붙었지만 그날이라서 안된다는 나의 말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음악을 바꾸고
나를 일으켜 세워서 백허그를 해주고는 그의 온기에 내가 깜박 잠이 들때까지 가만히 나를 안아줬다.

H와는 음악과 미술, 사진을 문자로 종종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H에게 내가 읽던 책 (바르트- 연인의 담론) 의 글귀를 토요일 저녁에 찍어 보냈는데 답장이 없길래
왜 답장이 없지 하고 한참을 곱씹어보다가 설마 내가 간접적으로 고백한걸로 받아들였나 싶어서
완전히 패닉한 상태로 일요일 아침 꼭두새벽에 잠이 확 깨서는

 "오쉣 근데 나 너한테 고백한거 같아 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거 아닌거 알지??" 

라고 말도 안되는 문자를 보내버렸다 ㅋㅋㅋㅋㅋㅋ

한참후에 "그렇게 안받아들였다" 고 답장이왔길래
다행이라고, 미안하다고, 좋지 않은 순간이었다고 문자를 했더니 답장이 없었다.
ㅅㅂㅅㅂㅅㅂㅅㅂㅅㅂ 나는 왜이렇게 이상할까 왜 그런 문자를 보냈을까 이틀내내 괴로워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 중 특별한 분들께 카톡을 막 했죠 ㅋㅋ 고마워요 <3 내가 징징거리는거 다 들어줘서 ㅠㅠ
오늘 저녁즈음에 갑자기 나한테 저번에 만났을때 자고 가라고 안해서 미안하다고, 자기는 혼자 아니면 잠을 잘 못잔다 그래서
한 두시간을 고민하다가 "괜찮아 :) 나도 우리집 아니면 잠 잘 못자" 라고 보냈더니
H가 "아무튼" 이라고 보내고 뭔가 말하다가 (아이폰에 "..." 뜨는거)
또 갑자기 사라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슨말하려다가 말았냐고 물어보려다가 또 찌질해질거 같아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친구가 말했다. 시詩같은거 문자로 좀 보내지 말고 앞으론 그냥 제발 평범한 말만 하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2.

토요일 I와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얘는 또 비건이란다.
나는 초식남을 끌어당기는 마성의 육식녀인가보다.
딱히 마음이 막 끌리진 않지만 나를 좋아하는거 같으니 시간을 두고 좀더 지켜보기로했다. 


23. 

음...B랑 무슨일이있었냐면요
자기는 진지하게 만날 사람을 찾고있는데 진지하게 만날 사람을 찾는동안 나를 캐주얼하게 만나고 싶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일단은 알겠다고 하고 온갖 쿨한척은 다하고 집에와서는 연락처랑 메세지 히스토리 다 지우고 친구들 붙잡고 나는 왜이럴까 하면서 울고 난리를 쳤단 말이지

근데 B에게서 일주일 반만에 문자가 왔다.

음식을 만들었는데 맛있어서 시간나면 저녁먹으러 오라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VENI VIDI VICI BITCH!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으하핳ㅎ하핳ㅎ하하하하하하ㅏㅏ
물어봐 준건 정말 스윗한데 나 이번주는 많이 바빠~ 이렇게 문자를 날려주고 지금 완전 통쾌해 하는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추신: 내가 쿨한거에 집착하는거처럼 보이는데 사실 맞다. 그런데 쿨하지 못해 미안해.

포도젤리 2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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